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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개인 소장용 구매불가)

풍금이 있던 자리 (개인 소장용 구매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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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소설 시절부터 ‘불륜’ 서사는 소설의 단골 메뉴였다. 워낙 이 소재가 대중적인 파급력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기 마련인), 소위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란 상징 코드가 중세적 사랑을 대신하던 시기와 소설이라는 장르의 탄생 시기가 겹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굳이 [적과 흑], [보바리 부인] 등을 상세히 언급하지 않더라도 소설은 애초부터 연애와 친연 관계에 있었다. 그러니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가 그 소재나 주제의 면에서 새로운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문체와 형식에 관한 한 이 작품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우선 이 작품은 한 여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에게 쓴 긴 서간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간체란 일종의 고백 형식이다. 즉 소통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가급적 섬세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업, 그것이 편지 쓰기이다. 게다가 그 편지가 수신인에게 어떤 긴요한 사연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현 상황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정리하기 위해 씌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경우 편지 쓰기는 자기반성의 계기이자 내면적 성찰의 과정이 된다. 가령 작중 ‘나’가 뱉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이 작품이 결국 ‘자기 들여다보기’ 서사에 다름 아니라는 판단의 근거가 될 만하다.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마을은 저를, 저 자신을 생각하게 해요.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다니요?” [풍금이 있던 자리]가 소위 ‘90년대 문학’의 전형적인 작품이자 그 신호탄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체들의 카섹시스가 외부 세계, 즉 사회 현실로만 향해 있던 80년대 문학에 비할 때, 신경숙의 문학은 확연히 새로웠다. 물론 이런 현상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권의 대대적인 몰락과도 관련이 있다. 이념에 대한 열정이 소진해가는 자리에서, 세계 대신 내면을, 공동체 대신 개인을, 그것도 지극히 시적이면서 서정적인 문체로, 더듬거리듯 속삭이듯 토로하는 문장들이 탄생한다. 신경숙으로 대표되는 90년대 문학이 시작하는 자리가 바로 거기이다.